"궁금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줄기세포 덕후’"
김예리 | 건국대 줄기세포재생공학과, 경기 계남고 졸업
친구들 사이에서 ‘과학 잘하는 애’로 통했다. 친구들이 잘 모르는 과학 원리나 개념을 게임으로 만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주거나, 심심풀이로 생활 속 과학 퀴즈 놀이를 즐기는 건 기본, 그러다 궁금한 게 생기면 쪽잠을 자는 한이 있어도 밤새 실험을 하거나 원서를 찾아 읽으며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건국대 줄기세포재생공학과 김예리씨는 고교 시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주제 탐구로 남다른 과제 집착력을 발휘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과학> 수업 시간의 병원균 관련 발표를 계기로 내성-항생제-EM-대장균-미생물-세포 배양에 이르기까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실험과 탐구 활동을 끈질기게 이어간 것이 대표적이다. ‘생물학적 순간 이동’이라는 개념을 접한 뒤부터는 줄기세포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취재 홍정아 리포터 jahong@naeil.com
사진 이의종
건국대 줄기세포재생공학과는 내 마음속 1순위!
고교 3년간 진로 희망은 한결같이 생명공학연구원이었기에 6장의 수시 원서를 모두 생명공학 관련 학과에 지원하는 건 당연했다. 예리씨는 이 중 3개 대학에 합격했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건국대 줄기세포재생공학과를 선택했다.
“처음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꽥’ 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줄기세포재생공학과가 제 마음속 1순위였으니까요. 합격한 다른 두 개 대학도 응용화학생명공학과와 화공생명공학과를 지원하긴 했지만, 줄기세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건국대 아니면 안 될 것만 같더라고요.”
물러설 곳은 없었다. 6장의 원서를 다 쓰긴 했지만, 만에 하나 건국대에 합격하지 못할 경우 재수까지 각오했다. 배짱 좋게 수능에 응시하지 않은 것도 그만의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험 드는 셈 치고 수능은 봐야 하지 않겠냐고들 했지만, 안 봤어요. 꼭 가고 싶은 학과가 아니라면 1년 더 공부해 다시 도전하는 게 맞겠다 싶었거든요. 합격 소식을 듣는 순간, 미친 듯이 기쁘다가 갑자기 막 설레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만날 머릿속으로만 상상하고 사진으로만 보던 줄기세포를 직접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죠.”
‘생물학적 순간 이동’ 개념 접하며 줄기세포에 빠져들어
예리씨의 뜨거운 줄기세포 사랑은 ‘인공지능의 발전과 미래’를 주제로 교내 진로 탐색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접한 한 편의 테드(TED) 영상에서 시작됐다.
“‘생물학적 순간 이동’에 관한 영상이었는데, 디지털 파일 형태의 DNA 명령문을 다운로드받아 생분자를 합성하는 변환기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DNA의 기능 단위, 백신, 단백질뿐 아니라 바이러스 입자까지 자동으로 합성해내는 기술이죠. 영문 프레젠테이션이어서 한 번에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여러 번 반복해 영상을 보고, 관련 책을 찾아 읽으면서 개념을 이해했어요. 생명공학 기술에 프로그래밍 언어를 접목하면 공간의 제약 없이 빠른 제조와 원가 절감으로 의학계의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더 구체적으로 생명공학 기술의 자동화 시스템 개발 연구원이 되리라 마음먹었죠.”
마음먹은 데서 그치지 않았다. 시스템 개발을 위해선 생물정보학을 배워야 한다는 걸 알았고, 2학년 때 경기도교육청 교육과정 클러스터 안에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과목을 수강했다. 두 학기에 걸쳐 1년간 수강을 마친 뒤에는 다시 ‘바이오 파이썬’을 독학하며 자신감을 쌓아갔다. 이런 그의 자기 주도적 학습 방법은 코딩뿐 아니라 교과목 공부로 확장을 이어갔다.
“<생명과학> 시간에 가족들의 유전자형을 조사·발표하면서 유전학을 접했어요. 유전공학의 기초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공부하다가 가족력 질병은 변종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후성유전학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는데, 염기 서열 변화 없이 여러 세대의 유전자 발현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교과 시간에 탐구 발표 주제로 삼았는데, 친구들이 너무 어려워하는 거예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제가 직접 게임을 고안해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조별 수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어요. 아무리 어려운 개념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심화 학습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 항생제 대체할 EM 배지 실험으로 가설 입증해
예리씨는 본인의 합격 비결에 대해 교내에서 진행한 “과학 주제 탐구 대회 활동이 주효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회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받은 건 2학년 말 무렵이었지만, 1학년 때부터 꾸준히 해온 실험 활동을 보완해 보고서 형식으로 재구성했다고.
“<과학> 시간에 병원균에 대해 배우면서 항생제를 끝까지 먹어야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내성이 얼마나 어떻게 생기는지 궁금했고, 과학동아리 활동 시간에 균이 내성을 얻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을 진행했죠. 영어 원서를 해석하며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하루에 두 문단씩 해결하면서 모르는 개념은 선생님께 여쭤봤어요. 터득한 지식을 기초로 돌연변이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항생제를 대체할 다른 물질은 없을지 또 다른 질문이 생겼죠.”
봉사 활동 시간에 접한 EM(유용미생물)이 혹시 항생제의 대체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고, 이를 과학 주제 탐구 대회의 가설로 세워 입증해보자고 다짐했다.
“EM과 대장균을 혼합한 후 경과를 관찰해야 했기 때문에 같은 실험을 수도 없이 했어요. 특히 어려웠던 건 오염되지 않은 무균 상태의 실험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클린벤치(층류 상태로 공기를 공급하는 기구와 입자 제거용 공기여과기를 갖춘 클린 룸을 소형화한 무균 상자)의 효과를 얻기 위해 알코올램프 세 개를 동시에 켜고 세균 배양하는 일을 반복했죠. 정말 고달픈 시간이었지만, 결국 EM 배지(미생물이나 세포 등을 증식시키기 위해 고안된 액체나 젤 상태의 영양원)를 통해 제 가설을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3년간의 땀과 노력 묻어난 낡은 노트, 꿈으로 펼쳐
예리씨의 이런 ‘덕후 기질’은 대학이 원하는 ‘전공 적합성’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면접 과정에서 그의 특별한 기질은 더욱 빛을 발했다. 면접 때 예리씨가 받은 질문은 과학신문반 활동에서 다룬 ‘줄기세포를 배양해 만든 인조 고기’에 관한 기사 내용이었다. 분자생물학을 통해 식물성 단백질을 원료로 하는 인조 고기 생산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보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차분히 설명드린 다음, 줄기세포가 시장 경제에 끼치는 영향과 파급력, 연구 과정의 생명윤리 척도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는 답변으로 마무리했어요. 만약 연구 지원비를 무제한으로 받게 된다면 어떤 연구를 하고 싶냐는 질문도 있었는데, 주저하지 않고 ‘줄기세포 생산의 자동화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앉으나 서나 줄기세포 타령’인 것 같지만, 제가 진짜 원하는 게 그거니까요. 면접관님들도 그런 제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최근 온라인 수업을 병행하는 예리씨는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전공기초실험 수업을 시작했다. 하얀 실험복을 입고 실험실 클린벤치 앞에 앉아 줄기세포를 직접 다루는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예리씨. 그의 줄기세포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를 보여준 학생부 & 자기소개서
학생부
1학년
▒ 창의적 체험 활동
과학탐구반에서 탄산수소나트륨의 열분해 반응 실험, 물방울을 이용한 중력 가속도 측정 실험, 간이 스피커 만들기 등을 통해 생활 곳곳에 과학이 작용함을 알게 됨
▒ 진로 활동
교내 인성 함양 프로젝트에 참가해 인공지능의 대중화에 따른 전망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고,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의 가치와 수학의 힘에 대해 탐구함
2학년
▒ 창의적 체험 활동
교내 과학신문반 편집부원으로 평소 줄기세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줄기세포에 대해 알아봤으며, 그중 줄기세포를 배양해 만든 인조 고기에 대한 기사를 부원들과 논의해 쓰게 됨. 동아리 부단장으로 1년 동안 동아리를 이끌며 원활히 활동이 진행될 수 있도록 전체적인 조율을 담당했고 구성원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초반에 이뤄진 실험들을 매번 주도적으로 준비함
▒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생명과학Ⅰ> 상염색체에 의한 복대립 유전인 ABO식 유전에 대한 가족관계를 조사·분석하고 가계도를 작성해 단일 인자 유전과 복대립 유전의 가계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함. 급우들에게 혈액형 원리를 설명하는 등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3학년
▒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교내 과학신문반 <영어Ⅱ> 인류를 살릴 생명공학 기술 10가지, 줄기세포의 연구 동향 등에 대해 영어로 소개함. <생명과학 2> 세포 호흡과 무산소 호흡의 논술 활동을 준비하면서 세포 호흡의 전 과정에 대한 단계별 과정을 분자식으로 정리함. 줄기세포의 종류와 차이점, 유도만능줄기세포 전환물의 연구, 유도만능줄기세포의 생성 과정 등을 조사했으며, 이를 이용한 인공장기 생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발표해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음
자기소개서
▒ 1번 학습 경험
항생제를 대체할 물질로 EM과 대장균을 혼합한 배지 실험을 진행한 경험. 오염되지 않은 무균 상태의 실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알코올램프를 활용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도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과제 집착력을 드러냈다.
▒ 2번 교내 활동
교내 인성 함양 프로젝트에 참여해 테드(TED)의 ‘생물학적 순간 이동’ 영상을 본 뒤, 생명공학과 프로그래밍 언어를 접목한 기술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피력함. 생물정보학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역 클러스터 교육과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프로그래밍을 학습한 경험을 풀어썼다.
▒ 4번 지원 동기와 노력한 과정
독서와 영상물 등을 통해 줄기세포를 이용한 난치병 치료와 바이오융합형 인공 장기를 주제로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 경험을 정리. 과학신문반 활동을 통해 건국대의 국내 최초 IRB(생명윤리위원회) 허가 키메라 장기 연구를 알게 되면서 희망 연구 분야를 결정하게 된 배경을 소개했다. 건국대에 진학해 생체조직공학을 배운 뒤, 대학원에 진학해 이후 줄기세포 연구 종합 설계 분야까지 뛰어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궁극적으로는 줄기세포 자동화 시스템을 연구하고 구축해 의료 취약 계층의 의료 접근성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 다짐하는 글로 마무리했다.
교사의 시선으로 본 수시 합격생
“과·알·못 담임쌤도 과학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의 소유자”
예리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목표가 분명해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을 이끌어가는 편이었어요.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명확히 알고 학교생활을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수업 시간, 쉬는 시간 할 것 없이 본인의 관심사가 나오기만 하면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보여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어요. 특히 과학에 문외한인 저를 비롯해 주변 친구들에게 미생물, 균류, 바이러스, 줄기세포 등을 설명해주는 걸 무척 즐거워했고요. 진로가 명확해 종합 전형 지원도 금방 결정했고, 평소 자기 관리가 잘돼 있는 학생이라 진학 상담도 수월했어요. 경험상 똑똑한 덕후들은 대학에서 분명 데려갈 거라 생각했기에, “너의 덕후력을 어떻게 하면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 집중했을 정도니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 달 넘게 대장균이랑 먹고 자며 실험을 이어가던 모습이에요. 그동안 차근차근 기록하며 모았던 자료들을 꺼내 보고서로 착착 만들며 대회를 준비하는 걸 보고, 수능 최저 기준은 신경 안 써도 되겠다 싶었죠. 분명 예리는 본인의 바람대로 우리 인류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생명공학자가 될 겁니다.
_3학년 담임 김현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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