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Ⅰ> 도전한 ‘찐’ 문과생 등급 고민보다 호기심 해결 우선!
이기람 |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강원 치악고)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역사·시사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역사학자를 꿈꾸다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책을 접했다. 다양한 성격의 인물, 사건을 보며 역사 너머 인간, 그리고 사회에 흥미를 느꼈다. 중학교 시절 시험 공부를 하러 찾은 도서관, 또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철학서 <직언>이었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큰 재미를 느꼈다. 실천적 철학을 다루는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에 멈칫했다. 개설 대학이 많지 않은 데다 교육과정에서 순수 철학 비중이 큰 철학과를 선뜻 선택하긴 어려웠다. 좋아하는 역사와 시사를 포괄한 ‘사회학’에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철학을 향한 애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길을 찾다 정치외교학 세부 교육과정에서 ‘정치철학’을 발견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이기람씨가 전공을 찾아간 과정이다.
취재 정나래 기자 lena@naeil.com
사진 이의종
인간의 이성, 뇌의 어느 부위에 존재할까?
‘하고 싶은 것’이 1순위였던 것은 과목 선택도 마찬가지였다. 모교인 치악고는 개설 과목이 다양하고, 학생의 선택권도 폭넓었다. 기람씨는 철학과 사회, 역사를 좋아해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철학> <법과 정치> <사회·문화> <세계사> <세계지리> 등을,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생명과학Ⅰ>을 선택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기반으로 삼아요. 이성이 뇌의 어느 부위와 관련있을지 궁금했죠. 고1 <과학탐구실험>에서 뇌의 신피질이 이성에 근접한 부위라는 가설을 세워 탐구 활동을 했어요. 뇌과학과 지능에 흥미가 생겼고, <생명과학Ⅰ>의 유전에서 관련 내용을 발견했어요. 과감하게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1등급을 받았어요. 지능의 정의와 유전 여부를 탐구하면서, 철학·역사 분야의 합리적·논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 과정이 유사하다는 점도 깨달았죠. 또 영어 선생님께서 <세계사> 외에 또 다른 역사 과목을 택하기보다 사람이 살아가고, 사건이 일어나는 ‘땅’을 이해해보라고 추천하셔서 <세계지리>를 이수했어요. 배워보니 기후·환경부터 지리정보, 역사, 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와 연계되더라고요. 서로 다른 학문이 이어지는 점이 신선했어요. ‘정치철학’을 발견하는 데도 영향을 주고받았고요.”
어렵다기에 완독한 <정의론>, 고3 다양한 탐구 바탕돼
고2 겨울방학, 존 롤스의 <정의론>을 찾았다. 존 롤스는 사회 정의와 관련해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현대 철학자다.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이 컸던 기람씨는 전문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의 부작용, 특히 정의와 공정을 둘러싼 문제들은 현재진행형이고, 능력주의와 부의 분배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라 정말 흥미로웠어요. <정의론>과 영향을 주고받은 것들을 역사와 철학 양면에서 살펴보고, 우리 사회의 정치·시사 이슈와 관련해 떠오른 단상을 정리했는데, 고3 탐구 활동의 밑바탕이 됐어요.”
특히 불의한 법이나 정부 정책에 대한 시민의 비판적 태도를 일컫는 ‘시민불복종’ 개념이 흥미로웠다. 학교 규정을 따르는 학생들의 모습에 ‘사람들이 왜 공동체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 따져보고 싶었다. <윤리와 사상>에서 소크라테스와 롤스의 준법 사상을 비교하고, ‘비판적 사고’에 바탕한 규칙 위반 사례에 시민불복종 개념으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 고민해 공유했다.
<정치와 법>에서 만난 헌법재판소는 우리 사회의 ‘시민불복종’ 사례와 그 정당성을 확인해볼 소재라 생각했다.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 판례를 분석하며, 문헌이 아닌 관습·관례의 형태로 존재하는 ‘불문(관습)헌법’에 바탕한 판결의 위험성이 눈에 띄었다. 판례 분석 수행평가 후, 헌법재판소에 대해 법·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따로 탐구해 발표했다.
“수업에서 탐구 활동은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수단이었어요. 세특이나 시간 관리, 진로 연결 등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쉬운데요. 어찌 됐든 기본은 수업이에요. 교과 개념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흥미 분야와 연결되는 지점이 보일 거예요. 혹은 그냥 더 궁금한 점을 파고들어도 괜찮아요. <수학Ⅱ>에서는 미적분을 수학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이견을 살폈고, <확률과 통계>에선 복권 당첨 확률과 수능 전 영역 95점 이상 받을 확률을 비교해보기도 했어요. 대학은 인문 계열 과목 선택을 폭넓게 열어둔 편이니, 다양한 과목에서 호기심을 다채롭게 해결해보면 좋겠어요.”
숙의 민주주의 시험대였던 공간 사용 토론
리더십 활동도 적극적이었던 기람씨지만 고3 학생회장 출마는 큰 도전이었다. 학교 성적과 수능 등 대입 준비로 바쁠 시기에, 상당한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정치철학으로 여긴 ‘숙의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해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학교 운영에 학생들의 자율권과 참여권을 보장하는 모교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당선 후 체육대회와 축제 등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공간 활용을 두고 불거진 갈등 해결 과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학교 곳곳에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자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는데, 수능을 불과 70여 일 앞두고 공간 활용에 대한 갈등이 폭발했어요. 정책 결정에서 이해 당사자들이 공론의 장을 만들어 합의를 도출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합리적인 해법이라 생각했어요. 강당을 대여하고,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알렸어요. 당시 고3학생의 절반가량인 100여 명이 모였고, 논의 끝에 휴식용, 자습용 등 각 공간의 역할을 부여하자는 결론을 내렸죠. 어느 한쪽도 희생하지 않고, 갈등도 해소한 셈이에요. 막연했던 정치철학 이론이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담론이라는 점을 알게 돼 성취감이 컸고, 진로도 재확신한 경험이었어요.”
교과서 밖 공부에 도전해보길
수시는 학생부종합전형과 학생부교과전형을 섞어 지원했다. 서울대 지역균형전형과 연세대 추천형은 최초 합격, 고려대 학교추천, 성균관대 학교장추천·학과모집, 한양대 지역균형발전은 추가 합격했다.
“대입 결과에 놀랐어요. 교과전형은 중복 지원·합격자가 많아 충원도 많지만 대학별 예비 순번이나 당락이 널뛰어 예측이 어렵더라고요. 수능은 최선을 다해도 변수가 많고요. <윤리와 사상>에서 1문제를 틀려 3등급을 받았어요. 내신이나 성적만으로 결과를 내는 전형보다 면접이나 학생부 평가가 있는 전형이 오히려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죠. 특히 면접은 학습 태도나 활동이 단편적으로 기록된 학생부 내용을 엮어 자신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예요.”
대학에선 원했던 공부를 마음껏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다.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대학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인문 계열은 경쟁력이 낮고,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편견이 크지만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지금 인문 계열의 통찰과 사유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각종 정책이나 리더십,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미쳐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으니까요. 영역을 넘나든 다양한 산업·직업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시대이고요. 인문 성향 후배들이 보다 자신 있게, 좋아하는 분야를 파보길 권해요. 특히 교과서 밖에서 길을 찾아보세요. 교과서엔 핵심 내용만 단편적으로 담겨 있어 어렵게 느끼기 쉬워요. 특히 윤리는 사상가의 삶이나 시대적 상황 등을 알게 된다면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수학 과학도 학자의 삶이나 실생활 속 사례를 찾아본다면 가깝게 느껴질 거예요. 이런 활동을 정리·기록한다면 수업에서 활용하기 좋고, 대입에도 도움이 되고요. 어려워도 도전하고 최선을 다한 후 성취감과 자신감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나를 보여준 학생부 & 선택 과목
의미 있었던 선택 과목
▒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고전과 윤리> <철학>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선택한 과목들이다.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은 수능에서도 선택했다. 선호 과목이 확실한 경우, 학교 수업과 수능에서 같은 과목을 선택하면 학습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 <세계사> <세계지리> 역사를 깊게 공부하고 싶어 선택한 과목. 다양한 지역, 다채로운 주제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만날 수 있어 시야를 넓혀준 과목이기도 하다.
▒ <국제법> <사회과제연구> 공동 교육과정으로 인근의 원주고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특목고에서 주로 배우는 전문 교과들로, 이전에 배운 사탐 과목들을 융합해 더 깊게 파고들고 싶어 선택했다.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1학년
<국어> <허생전>을 보고 박지원의 유토피아를 다룬 논문을 읽은 후 유교적 이상 국가에 대한 허생의 태도를 비판 <수학> 이항분포에서 사회 현상을 투영해 부의 배분과 양극화 현상을 설명 <한국사> 20세기 초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이후 한국의 생존 선택지를 게임 형식으로 재구조화해 설명 <통합과학> 미세 플라스틱의 문제점과 개인·사회·국제적 해법을 제시했으며 특히 해양 생물을 활용한 해법은 추가 사고 실험을 진행
2학년
<언어와 매체>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를 워드 클라우드로 분석,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이론과 접목시켜 각각의 특징을 분석 <수학Ⅱ> 연속함수 판정 프로젝트에서 학생 민원이 많은 급식 대기 현상을 관찰, 그래프로 표현해 분석한 후 토론을 통해 찾은 대안을 학교에 건의 <세계사> 동아시아의 전근대와 근대 이후 외교 체제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국제 질서를 각각 분석한 후 한중 관계의 어려운 점을 찾아 외교 전략 방향을 제시
3학년
<화법과 작문> <마르크스의 두 얼굴>을 읽고 정전론을 정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사례로 서평을 작성 <세계지리> 동양의 세계지도에서 드러나는 중화사상의 배경과 중국의 국가 면접 변화 과정을 지리적 관점에서 심화 탐구한 후 우리나라의 대응책을 제시 <심화국어> <공정하다는 착각> <덕의 상실>을 차례로 읽고 능력주의 담론을 심화해 탐구
교사의 눈으로 본 수시 합격생
“즐겁게 질문하며 성장해온 학생”
기람이는 고3 첫 상담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왜 공부를 하냐”는 제 질문에 “행복하고 싶어서”라고 답했거든요. 순수하면서 진지한 모습이 기특했습니다. 학생 자치회에선 ‘교내 멍때리기 대회’ 포스터에 학생회장인 자신의 멍때리는 얼굴을 넣는 희생정신도 발휘했죠. 학생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 홍보 효과도 높이면서 본인도 즐거워했어요. 수업 시간엔 집중력이 뛰어났고, 성실한 태도를 유지했고요. 고2 때부터 정치외교학과 진학을 강력히 희망했는데, 그 이유가 ‘정치철학’이었어요. 저에게도 생소해 찾아보니 정치에서 ‘물음’을 다루는 학문 분야더라고요. 평소 생활이나 수업 때 사소한 궁금증도 지나치지 않고 물어보던 모습이 떠올라 좋은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호기심을 질문하며 이해하고 성장해온 기람이가, 대학에서도 세상을 향해 물음을 던지며 자신의 길로 나아가길 응원하고 기대합니다.
_ 3학년 담임 허율리아 교사(강원 치악고, 지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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