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역사, 제주 4.3에서 출발한 외교 정책 연구원의 꿈
정현서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제주 대정고
중학교 때까지 이공 계열 진로를 희망했던 현서씨가 외교관, 외교 정책 연구원이라는 전혀 다른 진로를 꿈꾸게 된 계기는 제주 지역에 관한 관심이었다. 제주 지역에 관심을 가질수록 제주 문화, 제주 4.3사건, 제주어, 제주 옹기 등 탐구할 소재가 많아졌고, 호기심은 커졌다. 제주 대정 지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다녔는데, 작은 시골 마을이라 생각했던 지역이 역사적, 지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제주에 대한 애정도 커졌다. <경제수학> <법과 정치> <국제정치> <세계지리> 등을 배우며 국제사회 속 우리나라의 역할과 정책을 고민했던 현서씨의 얘기를 담았다.
취재 민경순 리포터 hellela@naeil.com
사진 이의종
슬픈 역사로만 인식했던 제주 4.3사건을 마주하다
초·중·고를 거치며 수업 시간에 잠깐씩 들었던 제주 4.3사건은 현서씨에게 슬픈 역사 정도로 인식됐다. 대정고에 입학해 4월이 되니 선배들이 분주해 보였다. 4.3 영화를 제작해 상영하고, 4.3 기념 배지를 만들어 홍보하는 모습을 보며 제주 4.3사건이 자신에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주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지만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왜 이런 비극적 사건이 제주에서 발생했는지 생각했는데 지역 내부의 원인도 국가 차원의 원인도 아니었어요. 2차 대전 이후 여러 국가에서 발생했던 지역 문제는 당시 동북아 세력 균형의 갈등으로 설명할 수 있더라고요.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였죠. 4.3사건을 탐구하면서 제주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얼마나 의미 있는 곳인지 알게 됐어요.”
제주 4.3사건과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비교했다.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을 희생시킨 국가 폭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해결 과정은 달랐다. 광주 5.18은 진상 규명을 위해 국제사회와 적극적인 연대가 이뤄졌지만, 제주 4.3은 폐쇄적인 역사가 돼버린 상황을 마주했다. 광주 5.18에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처럼 제주 4.3도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현서씨의 설명이다.
“제주 4.3과 광주 5.18은 일어난 시대와 변화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시민들의 의식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어요. 제주 4.3은 고립된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려 시대 서희처럼 외교 역량을 쌓아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외교관, 외교 정책 연구원을 꿈꾸게 된 계기였죠.”
현서씨는 제주도교육청이 주관한 제주청소년 모의유엔에서 인도 대사로 참가했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보호무역 등의 국제 이슈를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개발도상국은 강대국의 경쟁력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자유무역이 강조되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이 강점을 갖는 산업에 대해서는 한시적으로 보호무역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모의유엔대회를 준비하면서 강대국이나 우리나라의 시선에서 벗어나 개발도상국의 관점에서 국제사회를 바라볼 수 있었어요. 고2 때는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주 4.3 유엔 인권 심포지엄에 학생 대표로 참가했고, 직접 이야기해본 경험은 진로에 대한 확신을 줬죠.”
<세계지리> 통해 국제사회 이해 높여
외교관은 정부의 정책에 따라 외국에 파견된 공무원으로 직업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외교 정책 연구원은 국제 정세나 국제 교류의 방향 등을 고민하고 수립해나가는 직업이기에 외교 정책 연구원이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세계지리> <국제정치> <정치와 법> 등 국제사회에 대한 과목을 많이 들었어요. <국제정치>는 국제정치 체제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에 관심이 생겨 온라인 공동 교육과정으로 수강했어요. 이때의 관심이 <정치와 법> <경제>로 확장됐던 것 같아요. 선택 과목 중 가장 의미 있었던 과목은 <세계지리>였어요. ‘지리’ 하면 지형을 외워야 한다거나 지루한 과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역적 위치에 따라 어떤 특징을 갖는지 그 나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보통 <사회·문화>가 문화를 직접적으로 다룰 것 같지만,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배우는 과목이다. 대륙별 문화나 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은 <세계지리>라는 것. 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위치, 처한 환경, 역사, 특징 등을 알아야 한다. 그 나라의 지리적 위치를 이해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세계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난민 문제, 우리는?
<세계지리> 시간에 ‘난민 문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세계의 인구 이동과 더불어 난민들의 정치적 이동이 늘어나는 국제사회에서 왜 우리나라에는 난민이 거의 없는지 의문점이 생겼던 것.
“제주도에서 예멘 내전을 피해 무비자 입국한 예멘인 500여 명이 난민 지위를 신청하면서 난민 수용 거부 운동이 일어났죠. 한민족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가 보인 반응은 이슬람 혐오와 가난한 국가 출신의 난민들을 혐오하는 차별 주의, 이방인(외국인) 혐오증으로 불리는 제노포비아 등이었어요. 거기에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쏟아낸 언론이나 가짜뉴스 등도 문제였죠.”
우리나라의 난민 수용률은 2%로 세계 139위, OECD 36개국 중 34위다. 난민 문제는 이제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의 문제이며, 현서씨는 난민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어Ⅱ> 사회적 기업 만들기 수행평가에서 현서씨는 이주민과 국제 난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리스타트' 사업을 제안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이주민이나 난민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든데 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무능력보다는 다문화에 폐쇄적인 한국 사회의 인식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리스타트 사업은 이주민이나 국제 난민을 온·오프라인에서 언어, 문화 교사로 고용해 소득을 보장하고, 그들과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거예요. 이주민에게 한국어·한국 문화·정보화 교육 등을 제공해 우리나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 사업을 구상했어요. 총 수익의 10%는 이주민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기부하고요.”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해 사업 계획서의 완성도를 높였다. 난민에 대한 관심은 <언어와 매체>에서도 이어졌다. 현대 사회에서의 매체 언어의 영향력을 다루며 악성댓글이나 가짜뉴스의 영향력을 발표했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소중한 경험
수행평가나 학급 특색 활동으로 혼자보다는 모둠이나 학급 전체가 함께해야 하는 활동이 많았다. 고1 때 했던 학급 특색 활동은 현서씨에게 아픈 경험이었지만 결과보다는 여럿이 하는 과정의 소중함을 느끼게 했다.
“고1 때 학급 특색 활동으로 제주어 알리기를 기획했어요. 회의를 통해 제주어를 조사하고 소개 책자를 만들어야 했는데 기말고사까지 겹쳐 친구들의 호응이 저조했어요. 조급했던 제가 재촉하자 친구들과 갈등이 빚어졌고, 다급해진 전 혼자 밤을 새우며 자료를 찾아 편집하고 책자를 만들었어요. 결과물은 좋았어요. 그 상황을 모르는 선생님들이나 다른 반 친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지요. 우리 반 친구들에겐 의미 없는 책이었고요. 지금 생각해도 아쉽죠. 그때 친구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경험이….”
현서씨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리고 달라졌다. 영어 모둠 활동으로 사회적 기업 수행평가를 할 때 역할 분담을 하면서 친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려 했다. 영어로 작성하는 게 힘든 친구들은 한글로 문장을 적어 번역기를 돌려 작성해주면 다시 봐주기로 했고, 친구들이 원하는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소통했다. 혼자 결과물을 만드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담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결과물이 나왔을 때 함께 뿌듯함을 만끽할 수 있어 감사했다. 이런 시행착오는 연세대 자기소개서 3번에 고스란히 담았다.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뿌듯함은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친구들과 소통하는 법, 진정한 리더의 역할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 고맙다는 편지도 건넸는데, 남고에서 편지를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하하.” 현서씨는 고교 활동을 하면서 과목별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에 주로 쓰이는 주제를 정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며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학년마다 주된 관심 분야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과목별 수행평가나 보고서 주제를 정할 때도 외교 분야에만 집중하진 않았거든요. 학생부 기록이 진로와 무관하게 따로 놀진 않는지 고민도 했죠. 고3 때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위해 학생부를 분석하는 데 신기하게 일맥상통하더라고요. 하나의 주제에서 파생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겨 다른 과목으로 연결되는 신기한 경험을 한 거죠.”
학생부 기록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자신이 알고 싶은 내용을 찾아 탐구해간다면 학생부는 알차게 채워질 거라는 현서씨의 평범하지만 귀한 조언을 전한다.
나를 보여준 학생부 & 선택 과목
학생부
1학년
▒ 창의적 체험 활동 개발도상국과 신흥국은 보호무역 등의 국제적 이슈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해 제주청소년모의유엔에 인도 대사로 참가해 ‘개발도상국의 유치 산업에 한해 한시적으로 보호무역을 허용한다’는 주장을 하여 지지를 얻음, ‘5·18민주화운동 속 숨겨진 노력과 헌신’을 주제로 전라도 일대 주제 탐구와 부산의 도시재생 사업을 조사해 제주 지역 적용 방안을 고민함.
▒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국어>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 작품에 관한 질문의 답을 고민하며 주체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함, <영어> 투표가 모든 사람의 정치적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인지 궁금증이 생겨 <A rational vote>를 읽고 콩도르세 역설, 다양한 투표 방법, 투표율을 높이는 방법 등에 대한 심층 조사를 진행함.
2학년
▒ 창의적 체험 활동 제주 4.3 유엔 인권 심포지엄에 학생 대표로 유엔 본부에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 본부와 그 산하 기관을 조사하여 발표함, 온라인 공동 교육과정으로 <국제정치>를 수강해 각 대륙의 지리, 역사적 특성이 지역의 문화 형성과 사회 문제, 한반도 통일과 한국의 국제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함.
▒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수학Ⅱ> 수학과 경제, 실생활과의 연결 관계를 탐구함, 소득 불평등 정도를 구하는 지니계수, 국민의 소득 분배 정도를 보여주는 로렌츠 곡선을 설명함, <영어Ⅱ> 사회적 기업 만들기 수행평가에서 이주민과 국제 난민 관련 영어 사업 계획서를 완성도 높게 작성하고, 부정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방안을 발표함, <세계지리> 난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긴 이유와 우리나라의 난민 문제 정책 방향을 탐구함.
3학년
▒ 창의적 체험 활동 자율 주제를 선정해 탐구하는 학급 프로젝트 활동을 기획함, 첫 번째 발표자로서 ‘코로나, 세계를 바꾸다’를 주제로 코로나19 이후의 국제사회 변화를 보건 안보 분야, 외교 분야, 문화생활 분야 등으로 구분해 발표함, 고교학점제 교육과정으로 <경제> <경제수학> <한국지리> 등 외교 정책 연구원의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과목을 이수함,
▒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한국지리> 진로×지리 TED 활동에서 ‘한국의 관계적 위치 변화에 따른 국가 전략 탐구’를 주제로 조선 시대, 근대, 냉전, 현재로 나누어 분석함, <정치와 법> 제주국제자유도시 추진에 대한 과거 정치 과정의 흐름을 분석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한 단체의 입장을 정리하고 평가함.
선택 과목
▒ <국제정치> 국제정치 체제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에 호기심이 생겨 온라인 공동 교육과정으로 수강했다. 국제정치 체제의 변화 과정, 한반도 통일과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국제 정세에 맞는 한반도의 통상 정책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3학년 때 <정치와 법> <경제>를 신청하게 된 계기가 됐다.
▒ <세계지리> 외교 정책 연구원을 꿈꾸는 학생으로서 각 나라의 외교 정책을 수립하고 이해하는 데는 지리적 환경이나 특성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인구 이동, 국가별 지리적 환경이나 여건에 따른 기후, 문화별 특징 등 해당 국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던 과목이다.
▒ <사회과제탐구>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다각도로 탐구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송악산 뉴오션타운 개발 갈등’을 주제로 개발 정책의 접근법과 갈등 해결 방안에 대한 논문을 찾아 읽고, 송악산 주변 주민 인터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했다.
▒ <경제수학> 국가를 이해하는 데 경제 요소가 중요한데, 경제를 어떻게 수학적으로 접근하는지 궁금해서 선택했다. 주제 탐구 활동으로 ‘관세 그래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를 진행하면서 관세와 사회적 후생의 관계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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