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의 흔적 고스란히 담긴 언어, ‘문송’ 넘어 언어공학에 도전
김성은 | 한국외대 ELLT학과 (서울 관악고)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에 자신감이 있었다. 외국어에 대한 애정이 생기자 언어 자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각국의 역사와 문화가 언어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했고, 과학을 비롯해 전혀 다른 학문으로 연결되는 확장성이 좋았다. 친구들이 암기 과목이라며 지리를 좋아하지 않을 때도 “왜?”라고 되물을 만큼 여러 국가의 역사, 문화적 배경과 언어를 잇는 접근이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때 접한 한국외대 ELLT학과는 언어의 새로운 확장성에 눈을 뜨게 했다. ‘English Linguistics&Language Technology’의 줄임말인 ELLT학과는 ‘언어공학적 지식을 섭렵한 영어학자/언어공학자 양성’을 목표로 한국외대가 2018년 새롭게 개편한 학과다. 언어학적 지식과 공학적 사고를 동시에 배우는 곳이다. 3학년 때 개설된 <인공지능과 미래사회>를 이수하면서 해볼 만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문송하다’를 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국외대 ELLT학과에 최초 합격한 김성은씨를 만났다.
취재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사진 이의종
문법은 어렵다? 흥미진진한 언어 변천사
외국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언어학의 존재를 정확히 알게 된 건 3학년 때 들은 <언어와 매체> 수업에서였다. 문법 규칙을 암기하는 일을 곤욕스러워하는 학생들이 많지만, 성은씨는 언어의 변천에 숨은 배경을 찾는 일이 흥미로웠다.
“중세국어를 배울 때 우리말의 불규칙이 왜 생겼는지 배경을 이해하면서 들여다보니 재미있었어요. 예를 들어 우리말 ‘돕다’가 ‘도와’로 바뀌잖아요. 중세국어에는 순경음 비읍이 있었는데, 이게 사라지면서 현대국어에서 ‘도와’가 됐거든요. 지금 관점에서 볼 때는 일관되지 않은 불규칙으로 보여 어렵게 느껴지지만, 맥락이 있는 변천인 거죠. 문법 공부를 이렇게 접근하니 암기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언어의 이 같은 특징은 우리말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피겨선수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 선수에게 지면서 ‘분하다’라는 표현을 써 반감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이 말은 우리로 치면 ‘아쉽다’라는 의미에 가깝더라고. 역시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있는 언어적 차이였다.
“현재 국제적 갈등이 많잖아요. 문화나 언어에서 비롯된 측면도 많을 거예요. 이미 번역은 발달해 있지만, 언어를 꾸준히 연구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한 직역만으로는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들을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요. 언어를 전공하고 싶었던 것도 이 때문이고요. 이런 내용을 토대로 <언어와 매체> 수업에서 ‘언어와 사회’를 주제로 발표하기도 했어요.”
우리가 아는 영국 영어는 귀족층의 전유물?
번역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가의 언어를 직접 읽어보고 싶어 <오만과 편견> 등의 원서를 찾아 읽는 등 꾸준히 관련 활동을 해온 성은씨에게 <해리 포터> 시리즈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해리 포터> 영화를 보면 버스기사가 숫자 8을 우리가 알고 있는 ‘에잇’이 아닌 ‘옛’이라고 발음하더라고요. 흔히 영국식 영어 발음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저는 이런 발음을 왜 처음 들어보는지, 왜 하필 이 특이한 발음을 버스기사가 구사하는지 궁금했어요. 찾아보니 여전히 귀족과 평민이 존재하는 영국에서는 계층에 따라 발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우리가 익히 아는 영국식 영어는 귀족들의 발음이더라고요. 이 주제로 교내 ‘인문사회탐구발표회’에서 ‘현대사회 속 언어가 부와 권력의 세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발표했어요.”
조사해보니 영국에서는 다양한 발음이 쓰이고 있었고, 영국 내 표준 발음은 주로 상류층들이 구사하며, 이 발음을 구사하는 인구는 영국 전체의 약 3%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동자층이나 이민자들이 구사하는 발음은 표준 발음과는 달랐다. 발음은 직업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주로 귀족 학교에서 표준 발음을 구사하는데, 학력 수준과 경제적 지위가 높은 이들이 대부분 판사나 고위 공무원, 외교관 등의 직업을 갖고 있더라고요. 언어가 유리천장으로 작용하는 거죠. 영국 배우들 중 귀족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에게 영국식 영어가 표준 발음으로 대표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성은씨는 우리의 상황과 비교해 서울에서 지역 방언을 쓰는 이들을 알게 모르게 특이하게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문하며 발표를 마쳤다.
<인공지능과 미래사회> 배우며 자연어처리에 관심
언어 못지않게 지리 과목을 좋아했던 성은씨는 사회 교과에서 <한국지리>와 <세계지리>를 함께 선택하고, 진로선택 과목으로 <여행지리>까지 모두 섭렵했다.
“제게 지리는 암기 과목이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네팔에는 어린 소녀를 살아 있는 여신으로 숭배하는 ‘쿠마리’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잖아요.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아동학대나 인권문제로 비칠 수 있지만, 다신교가 특징인 힌두교도가 많은 네팔에서는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를 해요. 인권적 측면에서 정당화할 수 없는 문제지만, 어느 한 측면으로 낙인 찍기보다 역사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면 좀 더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더라고요. 문화상대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과목이었어요.”
학교 지정이었기에 선택한 과목은 아니지만 <인공지능과 미래사회>를 이수한 것도 지금 전공 선택의 계기가 되었다.
“고교학점제 선도지구 진로진학 특강에 한국외대 ELLT학과 교수님이 오셔서 ‘AI와 음성인식 기술’을 주제로 강의를 하신 적 있어요. 언어공학을 전공한 분이어서 기계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는 자연어처리가 무엇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주셨는데, 언어를 활용해 접목시키는 분야라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소에 언어를 배울 때 우리말을 형태소로 나눠 분석하는 걸 좋아했는데, 결국 컴퓨터를 이용해 사람의 자연어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기술이라고 하니 관심이 갔죠.”
정보 교사가 담당했던 <인공지능과 미래사회>를 배우며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해 패턴을 추출하는 것이 인공지능의 기본 원리임을 이해했다. 올림픽 데이터와 기후 데이터 등 실생활 데이터를 파이썬으로 분석해 그래프를 그리는 프로그램 등을 작성해보면서 인공지능 프로그래밍에서는 양질의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점도 느낄 수 있었다. 언어는 좋아했지만 문학에는 큰 흥미가 없었던 성은씨가 영어영문학과가 아닌, ELLT학과를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꼽게 된 데 톡톡히 역할을 해준 과목이다.
“열정 있다면 성적에 쫄지 말자!”
성은씨는 한국외대 ELLT학과에 수시 원서 세 장을 모두 할애했다. 학생부 교과 전형은 교과 성적을 기준으로 봤을 때 다소 상향 지원이었기에 서류형과 면접형으로 나뉜 학생부 종합 전형에 모두 지원했다. 특히 면접 비중이 높은 ‘면접형 전형’을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결과는 서류형은 추가 합격, 면접형은 최초 합격이었다.
“제가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공부할 때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훨씬 효율이 높았어요. 안타깝게도 고1이 되자마자 코로나로 학교에 정상적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1학년 1학기 첫 시험 결과가 좋지 못했고요. 학교를 아예 안 나가니까 동기부여가 잘 안 되더라고요. 심적으로 좀 힘든 시기였죠. 3년 평균 등급이 2등급 초반이었지만, 학교에서 하는 대부분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노력했어요. 수시 원서를 쓸 때 안정권이 아닌, 지원하고 싶은 대학과 학과 위주로 모두 결정했거든요. 6회 지원 중 절반을 합격한 걸 보면, 후회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도 그 정도 열의를 갖고 있다면, 교과 성적에 ‘쫄지 말라’고 꼭 얘기해주고 싶어요.”
나를 보여준 학생부 & 선택 과목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1학년
<영어> 언어의 기원과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관계라는 주제에 관심, <한국사> 원 간섭기 고려 시대 사람들의 가상 역사 일기 쓰기 활동에서 시대 관련 단어들의 뜻을 정리하고 다양한 낱말들을 이용해 시대 상황이 잘 드러나도록 작성
2학년
<세계지리>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영국 탄광 총파업이 배경인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느낀 점 발표, 우리가 왜 지리를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음, <중국어Ⅰ> 국어, 중국어, 일본어에 관심이 많아 각 언어의 특징에 대해 스스로 웹사이트를 찾아 공부, <여행지리> 진로로 희망하는 아나운서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가상여행으로 미국 뉴욕시에서의 관광객과 현지인 인터뷰 등을 설계
3학년
<독서> 언어 습득 이론에 대한 글을 읽고 행동주의론자인 스키너와 생득주의론자인 촘스키의 언어 습득 이론을 비교, <영어독해와 작문> 영어의 역사와 현대의 영국, 미국 영어를 주제로 조사, <사회·문화> 국제연합 회의 중 지정된 6개 공용어만 사용하는 것에 대해 기능론과 갈등론의 입장을 비교, 언어 사대주의 현상을 우리의 역사적 변동 과정에 따른 사례를 들어 설명
선택 과목
▒ <언어와 매체>. 언어학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과목이다. ‘언어와 사회’를 주제로 타국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과정에서 문화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기에 국제분쟁이나 인종차별 등의 문제도 언어를 통한 이해와 소통을 바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 <한국지리> <세계지리> <여행지리>. 언어와 함께 지리는 가장 애정을 가졌던 교과다.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 남한과 북한의 지역별 방언 차이, 각국의 역사·문화적 배경에서 바라본 문화 상대주의 등 언어를 토대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과목들이다.
▒ <중국어Ⅰ>. 성은씨가 재학했던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는 <중국어Ⅰ>과 <일본어Ⅰ> 중 택 1이었다. 245명 정원 중 <중국어Ⅰ> 선택자는 53명에 불과했지만,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는 등 일본어를 공부할 기회는 나중에도 있을 것 같아 중국어를 선택했다. 공부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가장 성적이 좋았던 과목이기도 하다.
▒ <인공지능과 미래사회> ELLT학과에서 배우는 언어공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던 과목이다. 기본적인 프로그래밍을 배우며 자연어처리와 데이터 활용 등에 대해 친숙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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